사진작가 최민식(崔敏植)의 작품을 통해 본 그 때 그 시절Ⅰ
사진작가 최민식(崔敏植)의 작품을 통해 본 그 때 그 시절 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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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최민식의 '얼굴' 작품을 통해 본 그 때 그 시절』Ⅱ http://blog.naver.com/ohyh45/220646552328
『사진작가 최민식의 '얼굴' 작품을 통해 본 그 때 그 시절』Ⅲ http://blog.naver.com/ohyh45/220647692227
나는 그의 사진을 볼 때마다 심한 통증을 느낀다.‘보라’. 그의 사진은이렇게 외친다. 이러한 사진을 보는 것은 생각하기도 싫은 악몽을 다시 꾸는 것과 같다. 崔敏植(최민식)은 악몽과 같은 우리 땅 현실에 맞서 사진가가 된 사람이다. 사진은 무엇보다도 예술이기 때문에 우선 아름답지 않으면안된다는 얼치기 심미주의자들에 둘러싸여 어려운 작업을 30년 동안이나계속해온 거의 유일한 작가로 나는 崔敏植을 이해해왔다.”
때로는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이 예기치 않은 해석능력과 함께 인접장르의 핵심에 육박하는 글을 남긴다. 글쓰기 대신 카메라를 메고 탄광촌인 사북지역을 돌며 얻어낸 고발사진을 모아 지난 85년 사진집 ‘침묵의 뿌리’를 펴내기도 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작가 조세희. 그는 사진작가 崔敏植(70)에 대해 ‘악몽과 같은 우리 땅의 현실에 맞선 작가’라는 옹호의 말을 남겼다.
崔敏植 사진의 핵심을 짚어낸 조세희의 앞 글은 그가 글을 썼던 80년대 상황의 분위기가 묻어나고 있고, 또 그 진솔함 때문에 서늘하게 다가선다. 그의 말들을 다시 곰곰이 음미해 보자. “소설을 쓰는 내 경험에 의하면 감동을 주는 사진은 예외없이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담고 있다. 崔敏植의 사진을 볼 때마다 나는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과 지금도 겪고 있는 일,무엇으로도 감출수 없는 상처에 대해 말하고 싶어진다.
미국 이스트만 코닥사의 흑백필름을 넣어들고 1950년대 중반이후 조국을 찍기위해 거리로 나선 작가 崔敏植의 망막을 아프게 찌른 것은 상처입은 동족의 슬픈 얼굴이었다. . 고통이 넓게 퍼져있는 땅에서 그가 해야할 일은 한가지밖에 없었다. 그것은 희생자들이 직면한 현실을 그대로 기록하는 일이었다.”(열화당 사진문고 22권 ‘崔敏植’서문) 연고지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해온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崔敏植은 우리 사진사에서 비교적 대중적으로 알려진 작가로 꼽힌다
.고질적인 아마추어리즘 때문에 사회적 의사소통의 채널을 확보하지 못한채 ‘끼리끼리의 폐쇄회로’에 갇혀있는 사진장르에서 그의 사진작업은 상대적으로 일반에게 소개가 많이 된 편이다.이런 대중성 확보는 50년대 후반이 후 현재에 이르는 40년 넘는 작업기간,빈민·부랑아·기층대중등 ‘소외받는 사람들’을 카메라에 담아온 소재의 일관성에 힘입고 있다.꾸준한 국내외 전시회와 수상기록,9권에 이르는 사진집 ‘인간’시리즈의 출간,단편적이지만 지속적인 사진예술론의 발표도 그의 고집스런 작업과 성격에 대한 인지도를 높였다.
하지만 이런 활동이 곧바로 崔敏植 사진의 미학에 대한 평가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냉정하게 말해 그는 “한가지 소재에 꾸준히 흥미를 가져온 아마추어 작가”,“싫증내지 않고 동어반복을 거듭한 작가”라는 후배들의 혹평을 감내해야 한다.평범하기 그지없는 기차역사 근처나 재래식 시장 주변,걸인들이 모여사는 다리밑이 그가 소재를 구해온 단골장소이고,이것은 그가 사진을 찍기 시작한 1957년이래 현재까지 거의 변함없다.40년 넘는 작품 활동과정에서 소재선택의 폭이 좁고,사진의 깊이감이나 앵글상의 변화를 찾아보기 힘든 점도 한계로 지적돼야 한다.
그의 작업의 결정적인 약점은 따로 있다.‘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사진작업은 미국 등 외국의 경우 1930년대 경제공황시기에 사진운동으로 발전했으나 崔敏植 주위에서 이렇다 할 사진운동이 전개됐다는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후배들도 없다. 그의 주변에 사진을 배우겠다고모여든 젊은이들은 꽤 있었으나 곧 싫증을 내고 떠났다. 결국 崔敏植은 사회적인 반향을 얻지 못한 ‘나홀로 다큐멘터리 사진 작업’에 그친 것이다.
50년대 이후 가장 변화의 진폭이 심했던 한국사회야말로 ‘사진의 해석작업’을 기다려온 곳인데도 주목할만한 사진운동이 없었다는 점은 실은 사단내부가 책임져야 할 대목이기도 하다. 어쨌든간에 혼자 작업한 崔敏植의 사진이 외국 거물 작가들의 다큐멘터리사진에 비해 상대적으로 완성도가 떨어지고 평면적인 점은 아쉽지만, 어쩔수 없는 사실이다. 崔敏植이 우리 작가이고 그의 작품에 담긴 것이 ‘내 이야기’임에도 작품이 주는 울림의 측면에서 적이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수천 점에 달하는 그의 작품들 중에서 몇 점의 대표작을 따로 추리는 것이어려운 것도 이런 사유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崔敏植에게 돌을 던질수 있는 사람은없다는 점이다. 우리 사진사에서 崔敏植이 ‘한국의 도로디어 랭’혹은‘ 한국의 유진 스미스’로 불리고 예우받아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작은 체구에 소아마비 여성사진가인 도로디어 랭(1895∼1965)은 1930년대 경제공황 당시 사회의 그늘에 가려있는 떠돌이 노무자 등을 렌즈 안에 끌어들이는 직설법의 사진을 구사해 미국 다큐멘터리 사진을 한단계 끌어 올렸다. 일본의 공해병인 이타이이타이병을 고발한 작품 ‘도모코를 목욕시키고 있는 어머니’로 유명한 유진 스미스(1918∼1978). 스케일이 크고 힘이 있는 작품을 남긴 그는 특이하게도 사진기자 사회뿐만 아니라 사진작가 일반사이에서도 평가가 고른 전설적인 작가로 추앙받는다.
이 두명의 작가는 崔敏植이 작가활동을 하면서 깊은 존경과 함께 따라 배우려 했던 대상들이다. “나는 살롱사진을 찍기도 해봤지만, 일본의 헌책방에서 이들의 사진집을되살펴 보면서 내가 가야할 길은 바로 이 길이구나 하는 판단을 굳혔다. 나에게 영향을 준 또 하나의 계기는 뉴욕현대미술관이 기획해 1957년 봄 서울 덕수궁에서 순회전을 가졌던 ‘인간가족전’이다. ‘인간성의 존엄’을 주제로 큐레이팅한 이 사진전의 한국순회전을 보면서 나는 내 직업의 방향을일찌감치 결정했다.” 崔敏植이 말하는 ‘인간가족전’한국순회전은 세계사진사적 의미를 갖는 이벤트였지만 한국 사진계, 나아가 문화계에 미친 영향은 외국보다 더 컸다.
사진이 폭발적인 예술성을 가진 장르라는 새삼스런발견이 이때 이뤄졌고, 국전에 사진부문이 만들어지는 계기를 마련하는 등 적지않은 계몽적 역할을 했다. 중요한 것은 사진은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선입견이 깨지고 대신 ‘삶의 진실’에 대한 탐구가 얼마나 위력있는 사진의 본령인지를 확인시켰다. 결혼 출산 근로 오락 질병 외로움 전쟁 굶주림등 우리의 생활상을 소재로 선택해 마지막에 어린이가 빛의 세계를 향해 걸어나가는 것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한 서사적 전시구성 자체가 당시 사람들에게 적지않은 감동을 줬다.
‘감각적 미의식에서 인간 삶의 진실로의 전환’은 崔敏植에게 구체적으로 인간탐구 작업으로 연결됐다. 육군철도연대 제대뒤 일본 도쿄 주오(中央)미술학원 디자인과 2년 수료뒤 별다른 사진 코스워크를 밟지않고 독학으로 사진기를 만지기 시작할 무렵의 첫 작업이자 그의 작업의 앞날을 상징하는 작품이 ‘서울 용산역앞에서’(1957년)이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만한이 사진은 용산역 부근의 건물 한 모서리에 부모없이 쪼그리고 앉은 4∼5세여자아이가 사발에 담긴 국수를 호옥 빨아들이고 있는 애처로운 모습을 잡았다. 거친 시멘트바닥 때문에 맨발이 더욱 안쓰럽고, 가녀린 손목과 고개를 숙인 자세등이 이 어린이에게 이 정도의 먹거리가 얼마나 귀한 것이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부산 구포다리밑 빈민천막, 부산 부민동·광복동 등지의 걸인들, 자갈치 시장의 상인들, 부산항 부두와 선창가 등이 崔敏植이 40년간 카메라를 들이댔던 장소들이다. 젖가슴을 드러낸 채 두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어머니의 애처로운 모습, 영양이 부족해 빈혈인듯 한손으로 이마를 감싸안은 10여세 소녀의 찡그린 표정, 지하도 계단 중간에서 담요로 전신을 감싼채 웅크리고 있는 걸인등은 조세희의 말대로 ‘악몽’으로 남아있는 50∼70년대 우리의 상처를 가감없이 보여준다. 그가 초창기에 지속적으로 작품활동이 가능했던 것은 가톨릭계의 자선단체 ‘한국자선회’소속으로 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崔敏植의 자부대로 그의 작업은 국내보다는 외국에서 더 알려졌다. 상업적 보상과 가장 무관한 종류의 서적이 바로 사진집인데, 그의
사진집 ‘인간’시리즈의 상당 부분을 경북 왜관의 외국인 신부가 운영하는 분도출판사에서 맡아줬다. 62년 대만 국제사진전에서 그의 작품 2점이 입선한 이래 지금까지 3백점 가까운 작품들이 입선한 것도 미국 일본 프랑스 등지였다. 70년 미국 오하이오주 디반보트시립미술관과 일본 니콘살롱등 2곳에서의 초대전이후 10여차례의 전시회 역시 주로 외국에서 이뤄졌다. 71,73년 미국사진협회 최우수작품상등 외국에서의 평가와 달리 국내에서는 그에게 87년 예술문화대상 본상의 영광을 줬을 뿐이다.
칠순의 나이에 부산 해운대에 살면서 작품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그가 지치지 않고 ‘소외받는 사람들’에게 애정을 표시할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생활 자체가 부유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별다른 수입없이 경성대 창원대등 대학 출강, 개인지도, 문화센터 강사등으로 생계비를 충당해야 했던그는 ‘돈이 있으면 작업을 하고 없으면 줄이고’하는 긴축생활이 몸에 뱄다. 조만간 부산일보사에서 그의 대표작 3백15점을 모아 사진집을 발간하고, 올가을에는 미국에서 개인전을 갖게 된다. <趙祐奭기자>
1. 사진가가 되기 까지
1928년 황해도 연백군의 가난한 소작농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작가의 아버지는 몸이 불편해 집에서 도장을 파며 돈을 벌었고, 나머지 일곱 식구는 소작을 하거나 나무를 하면서 매우 가난한 삶을 살았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최민식 작가의 아버지는 최민식 작가에게 성 빈첸시오[1]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삶을 살라는 가르침을 주었고, 그림을 잘 그렸던 작가에게 밀레처럼 가난한 서민의 모습을 그리라는 조언도 해 주며 최민식 작가의 작품세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최민식 작가가 열다섯살이 되던 1943년, 작가의 아버지는 작가에게 손재주가 좋으니 도회지로 나가서 돈을 벌어보라고 권유했고 최민식 작가는 평안남도 진남포[2]에 있는 미츠비시 기능자 양성소에서 2년 동안 기술을 배운 후 비행기 날개를 만드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에는 노동자들의 안전따위 아웃 오브 안중이었기에(...) 염소가스[3]를 들이마시며 일을 해야 했다. 그 때 공장의 염소가스가 어찌나 독했던지 면 작업복이 하루만에 삭아서 닳아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그렇게 목숨 걸고 한 달에 받는 것이 쌀 한 가마(...) 만약 오랫동안 일을 했더라면 목숨이 위험했을 지도 모르지만 하늘이 도와서인지 2년만에 해방이 찾아와 최민식 작가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해방이 되자 작가는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던 그림 공부를 위해 서울로 상경하게 된다.[4] 집안은 가난했지만 그림 공부를 하고 싶었던 작가는 값비싼 학원비를 충당하기 위해 낮에는 식당에서부터 인쇄소, 제과공장 등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일을 하고 밤에는 미술학원 야간반을 다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3년간 병참부대의 철도대대에서 부사관으로 군복무를 하게 된다.
1953년 전쟁이 끝나고 군복무를 마친 작가는 결혼을 하고 나서 가정을 꾸리기 위해 처남과 함께 모직공장에서 일하게 되지만, 미술에 대한 열망을 잠재울 수 없었던 그는 결국 아내와 처남에게 일본 유학을 떠나겠노라고 선언하게 된다. 다행히 아내와 처남은 작가의 일본 유학을 지지해주었고 특히 처남은 그가 일본으로 떠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던 그는 1955년 일본으로의 밀항길에 오르게 된다. 어두운 새벽 영도에서 16명의 사람과 함께 작은 어선으로 일본 큐슈에 도착한 작가는 큐슈에서도쿄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일본어는 유창했지만 일본인과 구별하지 못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기에 검문에 걸릴까 봐 노심초사하고 있었지만 다행히 기차 안에서 어느 일본인의 도움을 받아 검문을 피할 수 있었다.[5]
도쿄에 도착한 그는 곧바로 학비를 벌기 위해 일자리를 찾았고, 도쿄의 식당에서 일자리를 구하게 된다. 그런데 정말 운 좋게도 그 식당 주인의 딸이 도쿄중앙미술학원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있었던 미술학도였고(...) 식당 주인딸의 도움을 얻어 도쿄중앙미술학원 야간부에 입학하게 된다. 아무래도 식당에서 버는 돈만으로는 미술학원 학비를 대기에는 무리가 있었기에, 그는 학원 동기들과 손수레로 폐품을 모아 팔면서 돈을 버는 등의 일을 병행하면서 학비를 마련했다.
낮에 여러가지 일을 하면서 자금에 여유가 생겼던 작가는 돈이 생길 때마다 헌책방에 들러 책을 사기 시작했다. 바로 그곳에서 작가는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작가 曰 반세기 동안 사진에 미쳐 카메라를 둘러메게 만든) 작품인 에드워드 슈타이켄의 사진집 인간가족을 만나게 된다.
2. 사진작가로써 민주화 이전의 삶
인간가족을 보고 사진에 푹 빠지게 된 그는 헌 카메라를 사서 사진을 찍기 시작하다가, 1957년 일본에서 미술 공부를 마치고 귀국길에 오른 후 미국인 신부가 운영하는 고아원 '소년의 집'에서 전속 사진사로 고용되면서 본격적인 사진가로써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사진작가 생활을 시작한 이래로 인생의 대부분을 부산에서 보내며 부산 서민의 모습, 특히 자갈치 시장의 서민들의 모습을 사진 속에 많이 담아냈는데, 이 때문에 자갈치시장 사람들이 그에게 자갈치 아저씨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하였다.
사진작가로써의 평가가 어땠는 지는 몰라도, 그는 사진작가로 살면서 가난하고 힘든 삶을 살아야만 했다. 팔리지 않는 사진을 찍었기 때문이었다.[6] 당장 필름과 인화지를 구하기도 힘들었다. 지금에서야 흔하게 구할 수 있는 물건들이지만 그 당시엔 구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필름은 주한미군부대의 지인을 통해서 구해야만 했고 인화지는 일본에서 밀수한 것을 사서 써야만 했다. 또 사진 실력을 키우려면 다른 사람의 작품을 보며 사진기법을 공부해야만 하는데 시대가 시대이다 보니 해외 사진집을 구하기도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외국 작가들의 사진을 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그는 제지공장 사장에게 부탁해 미국에서 수입해온 폐지를 뒤져야만 했다. 폐지를 뒤지면 제일 많이 나오는 잡지가 라이프였다고(...)
하지만 한 주제만을 고집해온 그의 노력은 헛된 것이 아니어서 1962년 대만 국제사진전을 시작으로 수많은 국제 사진전에서 그의 작품이 입상하게 된다. 특히 1967년 영국 사진연감에서 그에게 카메라계의 렘브란트라는 별명을 붙여준 것으로 시작해서 빛의 사진작가, 가장 한국적인 사진작가 등의 호평이 쏟아지게 된다.
국내에서도 1963년 제1회 동아 사진콘테스트 입상을 시작으로 다음 해 한국 국전에 입상하게 되고, 1969년 국내 첫 개인전을 열게 된다.
그리고 드디어 1968년 동아일보를 통해 그의 첫 사진집 인간' 1집이 나오게 된다.
3. 핍박과 고난
그의 사진은 팔리지 않는 사진이었을 뿐만이 아니라 높으신 분들의 마음에도 들지 않는 작품이었다(...) 한강의 기적 뒤에 숨겨진 대한민국의 어둡고 가난한 모습을 왜 자꾸 들춰내서 국제적으로 망신을 시키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물론 최민식 작가는 작품활동을 그만 둘 생각이 없었기에(...) 최민식 작가는 독재정권이 끝나고 민주화 시대가 오기까지 수많은 핍박과 고난을 받아야만 했다.
정부는 전방위로 그를 압박해왔다. 작가가 생계유지를 위해 운영한 사진관에는 중앙정보부의 공작으로 손님이 뚝 끊기고 말았다. 정권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진작가였기에 중앙정보부에 셀 수도 없이 끌려가서 모진 고초를 겪었다. 그는 유럽의 7개국에서 총 20여회의 사진전을 개최하는 영광을 받았지만 정작 정부에서 여권을 주지 않아서 자신의 사진전에 참석할 수도 없었다.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한밤중에 집에 쳐들어와 구둣발에 온 집안을 헤집어놓는 것은 예사였다. 때론 해외여행을 보내주겠다거나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등 정부에서는 온갖 회유책을 동원하기도 했지만 그는 그가 평생을 지켜온 인간이라는 주제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모진 고초를 겪고 있을 때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것은 베네딕토회 왜관 수도원의 임인덕[7] 신부였다. 베네딕토회 소속 분도출판사의 사장이었던 그는 정부의 압력으로 출판이 어려워진 최민식 작가의 사진집 인간을 출판해주기로 하고 가난한 그에게 금전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만약 베네딕토회에서 최민식 작가를 지원해준다는 것이 들키면 임인덕 신부도 위험할 수 있었기에 모든 지원은 극비로 이루어졌다.
결국 중정에서는 그의 창작욕을 꺾기 위한 극단의 처방을 쓰게 된다. 프랑스 문화원에서 최민식 작가의 작품을 전시하고 싶다고 최민식 작가에게 연락을 하자 작가는 자신의 작품 중 가장 가치있는 것으로 고른 500통의 필름을 비행기편으로 프랑스 문화원에 보내게 되는데, 돌연 수송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며 프랑스 측에서 필름을 돌려주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게 최민식 작가는 자식처럼 아꼈던 필름들을 모조리 분실하게 되는데, 훗날 밝혀진 바로는 프랑스 문화원과 중정이 결탁해서 꾸민 일이었고 그 필름들은 모조리 중앙정보부로 인계되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행색이 꾀죄죄한데 좋은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사진을 찍으러 다녔던 그가 간첩처럼 보였던 사람들은 그를 간첩이라며 동네 경찰서에 신고하기도 하였다(...) [8] 추운 겨울날 한창 사진을 찍고 나서 몸을 녹이고자 들어간 다방에서 갑자기 동네 순경이 들이닥쳐 그를 끌고 가는 일은 예사였고 심지어는 그가 반평생을 살아온 부산의 자갈치시장에서조차 간첩 신고를 당해 동네 경찰서로 끌려간 적이 있었다. 설상가상이라 했던가, 심지어는 1967년 울릉도에서 북한 간첩이 체포되었을 때 간첩의 소지품에서 하필이면 그의 사진집이 나와 생사의 기로에 놓였던 적도 있었다(...) 만약 사진집에 그의 싸인이라도 있었으면 중앙정보부에서는 옳다구나 하고...
그렇게 수많은 핍박과 고난을 받던 그에게도 봄날이 찾아왔다. 제6공화국이 시작된 것이었다.
4. 민주화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민주화 이후에도 꾸준히 작품활동을 계속한 그는 1986년부터 인도나 네팔, 유럽 등 다양한 나라에서 작품 활동을 하는 등의 새로운 시도에 도전한 한편, 대한민국 사진계의 1세대이자 거장으로써 지역사회에서 정기적으로 사진 특강을 개최하거나 여러 대학에 출강을 나가는 등 후학 양성에 힘을 쏟았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로를 높이 기려 2000년 옥관문화훈장을 수여하였고 이어 국내 사진전에서 봉생문화상, 대한사진문화상, 백조사진문화상 등 수많은 상을 수상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그의 작품이 역사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 민간인으로써는 최초로 2008년 국가기록원에 그의 작품 15만점을 보관하기로 결정하였고 현재는 필름에 담긴 15만점의 작품 전부를 디지털화하여 보관 중이라고 한다.
그는 고령의 나이에도 꾸준히 작품활동을 계속해온 결과 2010년 인간 14집을 출간하였고 모 인터뷰에서는 15, 16집에 대한 계획도 다 세워놓았다며 죽기 전에 아프리카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싶다고 밝히는 등 사진에 대한 열의를 보이기도 했다. [9]
그는 2007년에는 평생을 고집해온 필름 카메라에서 니콘 D300 DSLR로 기종을 변경하기도 하였는데, 그 동안 비싼 유지비용을 들여가며 필름 사진을 찍었던 것은 필름 사진의 품질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지만, 21세기에 와서는 디지털 카메라의 성능이 좋아졌고 무엇보다도 경제적이기 때문에 기종을 변경하게 되었다고 밝혔다.[10]
2013년 2월 12일 부산의 대연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선종하였다. 향년 85세. 장지는 국립영천호국원이다.
선종한 최민식 작가를 기리고자,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를 대상으로 협성문화재단과 국제신문이 공동제정한 최민식 사진상을 수여한다고 한다.
1972년 있었던 최민식 작가의 도쿄 펜탁스 갤러리에서 조총련 사람들이 와서 작품을 꼼꼼히 보고 하나하나 사진을 찍어 가더니 사진전 방명록에 "인민 공화국 만세", "최 작가님 건투 바람", "평양에서 초청전을 하라" 등등(...)의 글이 적혀 있어서 또 중앙정보부에 끌려가게 되었다고 한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정부에서 여권을 발급해주지 않아 사진전에 참석을 못했기 때문에 무혐의로 풀려날 수 있었다고
최민식 작가는 운전면허도 따지 않았고 운전 할 줄도 모른다고 한다. 자가용이 있으면 편리하겠지만 사진활동을 위해서는 서민들과 함께할 수 있는 대중교통을 타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느날 자갈치시장을 돌아다니던 작가는 모델이 될 만한 귀여운 소녀를 발견하게 되었고, 그 아이를 700미터쯤 떨어진 해변가로 데려 가서 여러 포즈를 시키면서 30분 동안 사진을 찍은 후에(...) 아이를 데리고 자갈치 시장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물론 소녀의 가족들은 아이가 납치된 줄 알고 30분 동안 자갈치 시장을 온통 헤집고 다녔고 가족들은 당연히 최작가를 보자마자 온갖 욕설을 퍼부어 대며 살벌한 분위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자 위협을 느낀 작가는 냅다 도망쳐버렸고(...) 그 이후로는 그 근처로 얼씬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엄청난 책벌레라고 한다. 작품은 경험과 지식에서 나온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장르를 불문하고 자택에 수천권의 책을 소장하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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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 빈첸시오 드 폴(Vincent de Paul) 1581년 ~ 1660년 선종 '빈첸시오회와 라자로회' 선교회를 설립하고 가난한 사람을 위한 병원과 고아원을 설립한 프랑스 신부, 1737년 교황 클레멘스 1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2] 지금의 남포특별시
[3] 염소 항목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염소가스를 들이마시면 몸 안의 물과 합쳐져 염산이 되고, 폐를 녹여 끔찍한 고통과 호흡곤란으로 사람을 데꿀멍하게 만든다!
[4] 이후 한반도가 분단되면서 이산가족이 되고 만다
[5] 작가의 회고에 따르면 "본인과 함께 도쿄로 갔던 남자 1명을 제외하고 함께 밀항한 나머지 14명의 사람들은 전부 한국으로 강제송환 당했다고 한다. 이 정도면 정말 하늘이 도운 게 아닐까 싶다(...)
[6] 최민식 작가가 얼마나 힘들게 살았던지 장성한 그의 아들이 카메라를 사서 사진을 찍으러 다녔을 때 최민식 작가의 부인이 아들 카메라를 뺏으며 "너도 네 애비처럼 되려고 그러냐!" 라며 아들을 혼냈다고 한다(...)
[7] 독일인 신부이다. 본명은 하인리히 제바스티안 로틀러. 2013년 10월 13일 선종
[8] 그런데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 국민들이 교육받았던 간첩 식별요령으로 놓고 봤을 때 사실 최민식 작가는 신고당할 만 했다(...) 옷차림이 허름하고 유행에 맞지 않는 자, 남 몰래 주요 시설물을 촬영하는 자 그 당시 간첩 신고를 하면 받는 포상금이 3천만원이었다고 하니 주민들은 일단 신고부터 하고 보자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9] 최민식 작가가 선종하였기에 유족들이 그의 미발표작들을 정리해서 인간 15집을 유고집으로 출간한다고 한다.
[10] 렌즈는 주로 여행렌즈 하나만 들고 출사를 나갔다고 한다. 고수는 장비를 탓하지 않는다..?
최민식 년보
1928년 황해도 연안 출생
1945년 평안남도 진남포 미쯔비시 기능자 양성소 기능교육과 기능공으로 근무
1957년 일본 동경 중앙미술학원 디자인과 2년 수료. 사진작업 시작
1962년 카톨릭계의 한국자선회 사진 담당. 인간을 주제로 한 사진을 찍기 시작함
[사진전 및 저서]
1962년 대만 국제사진전 입선
1963년 제1회 동아 사진콘테스트 입선 이후 국내의 여러 사진 공모전 입상 입선
1964년 한국 국전 입선
1966년 미국 'US 카메라' 사진공모전 입상 / 프랑스 꼬냑 국제사진전 시 명예상 수상
1967∼1987년 국내의 사진지 및 월간, 주간지에 200여 점 특집 수록
1967년 부산시 문화상 수상 / 호주 태평양지역 사진전 입상, 명예상 수상
'카메라의 렘브란트'로 격찬 받음, 서독《국제사진연감(Foto almanach》수록
호주 시드니국제사진전 '인생과 그의 감정'부 10개 부문에 24점 입상, (종합특별상 수상)
1968년 개인 사진집 《인간》제1집 동아일보사에 출간
일본《세계사진연감》/ 영국《사진연감》/ 서독《국제사진연감》수록
1970년 미국 아이오아 주 디반포트 시립미술관 개인 초청전
일본 동경 '니콘 살롱' 개인 초청전
1971년 일본 동경 '펜탁스 갤러리' 개인 초청전
1973년 개인 사진집 《인간》제2집 출간
1974년 한국사진문화상 수상
1980년 도선사진문화상 수상
1981년 개인 사진집 《인간》제3집 출간
1982년 서울 독일문화원 화랑에서 개인 초청전 (독일정부 초청)
개인 사진집 《인간》제4집 출간
1983년 독일 본 'IFA Galerie' 개인 초청전/ 프랑스 파리 'Fanc Gallery' 개인 초청전
1984년 개인 사진집 《인간》제 5집 출간
프랑스 'Colmar Gallery' 개인 초청전
벨기에 'Bruxelles Gallery' 개인 초청전/ 독일 'Ingelheim Gallery' 개인 초청전
1985년 이탈리아 'Torino Gallery'개인 초청전/ 현대사진문화상 수상
1986년 개인 사진집 《인간》제6집 출간/ 서울 프랑스문화원 화랑 개인 초청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Canon Photo Gallery' 개인 초청전
서울 독일문화원 개인 초청전
1987년 예술문화 대상(본상) 수상, 사진집 출간
1990년 개인 사진집 제7집 《이 사람을 보라》출간
1990∼1996 경성대. 창원대. 경북산대. 동아대 출강
1991년 《리얼리즘 사진의 사상》/《포트레이트 연구》/《작품 사진 연구》출간
1993년 《세계 걸작 사진 연구》/《인간이란 무엇인가》출간
개인 사진집 《인간》 제 8집 출간
1994년 봉생문화상(창작상) 수상
1995년 대한사진문화상(창작상) 수상 외 수상, 전시경력 다수
1997년 개인사진집 <인간>제9집 출간.
2000년 10월 옥관문화훈장 서훈
2010년 개인사진집 <인간>제14집 출간.
2011년 생각이 머무는 곳에 인생이 있다 (최민식의 포토에세이) 출간
1970년부터 미국, 독일, 프랑스, 일본 등 7개국에서 15회의 개인 초청전을 가진 바 있다. 현재 한국사진작가협회 자문위원, 미국사진작가협회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인제대학 및 부산예술대 출강하고 있다.
1957년 부산. 이 시절에는 두 소녀처럼 학교도 못 가고 가사를 돌보며 사는 아이들이 많았다
1957. 부산
부산, 1958. 20.3 cm X 26.4 cm,
부산, 1958.
부산. 1958.
부산항부두 . 1959.
부산.1959.
1959년 부산. 한 부둣가에서 생계를 위해 찐고구마를 팔고 있는 모자의 모습은 오히려 잘 먹지 못 해 영양실조에 걸린 것처럼 보인다.
부산. 1959.
부산. 1959
부산. 1960.
부산. 1960.
부산. 1960.
부산. 1960.
부산. 1961.
부산. 1961.
부산. 1961.
웃어 달라, 움직이지 말라, 이쪽을 봐 달라고 하는 순간 진실은 부서져버린다는 게 나의 방식이야. 연출하면 진실하지 못해. 그렇다면 조작하지 않는다면 다 진실이냐는 질문을 받는데 그건 아냐. 대상에 대한 나의 생각과 느낌이 일치해야 진실이 되고 예술이 되는 것이지. 나는 아이들에게 웃어 달라고 하지 않았어. 아이들의 웃음이 우연히 내 사진 속에 들어 온 거야. 셔터를 누르는 순간, '꽤 괜찮은 걸 건졌구나'하는 느낌이 팍 오더라고... 난 아이들의 웃음이야말로 진정 인간적인 웃음이라고 봐.
1961년 부산
나의 사진에는 우리 현대사의 얼룩 그 절망과 비극의 감정이 담겨 있다. 이러한 감정으로 가득한 사진을 접하게 되면 누구나 숙연한 마음을 갖게 된다.
부산. 1961.
1961년 부산 길가에서 구걸하는 모녀의 모습
1962년 부산
불평할 줄 모르는 자들의 삶은 얼핏 평화롭게 보입니다. 하지만 잠든 어머니가 기대고 있는 벽처럼 저들의 지반에는 균열이 많습니다
대구역앞에서. 1962.
대구역 앞에서 . 1962.
부산 구포다리 밑 빈민 천막 . 1962.
부산. 1962.
부산. 1962.
부산 광복동. 1962.
부산. 1962.
부산 범일동. 1963.
선거 유세장에서. 1963.
부산부민동. 1963.
부산 문현동.1963.
부산부민동. 1963.
부산 부민동
1963년 부산. 태극촌이라는 종교마을의 전경.
기하학적으로 보이는 이 판자촌은 당시 북한과 타 지방에서 이주해온 피난민들이 주로 살고 있었다.
부산. 1963. 20.3 cm X 25.4 cm.
부산 광복동, 1964.
부산 남일국민학교 어린이 . 1964.
부산 범일동. 1964.
나는 궁극적으로 인류의 평화와 행복, 사랑을 위해 사진을 찍어. 그림을 공부하러 일본에 갔다가 사진가가 되어 돌아온 나는 부산의 고지대를 누볐어. 1963, 범내골 고지대 어느 마을 판자촌에서 목격한 풍경이 바로 이 작품, <부산, 1963>이야. 좀 심심하고 평면적으로 보이지? 하지만 이 사진은 많은 이야기가 담고 있어. 당시 고지대엔 식수 사정이 엉망이었어. 양동이 한 통에 얼마를 받고 물을 팔았어.
부산. 1965.
부산. 1965.
부산. 1965.
부산. 1965.
부산 자갈치 시장. 1965.
부산. 1965.
부산.1965.
부산항 부두. 1965.
부산. 1965.
부산 자갈치 시장. 1965.
부산. 1965.
부산. 1965.
부산. 1965.
부산.1965. 영도교 부근.
1965 부산 광복동
광복동, 부산, 1965. 이 어린 불구 소년을 부산의 중심거리에서 발견했다. 한 시간 후 다시 와 보았지만 그의 손에는 한푼도 없었다. 당시 군사정부는 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경제개발을 서둘러 추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여전히 버려져 있었다. - 최민식ㆍ조세희, 『최민식』(열화당 사진문고)
사진 기기는 기술적으로야 완벽하지만 손이나 뇌와 비교하면 엉성한 기계일 뿐이다. 더욱이 가장 아름다운 사진 작품들은 초창기 때 것들이다. 사진 기술이 그다지 발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작가는 자신의 시간과 의지를 투자하지 않으면 안 됐다. 모를레 신부는 18세기에 이렇게 썼다. “자연은 어머니 품(또는 연인의 품) 안에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아름다운 그 순간조차 아름다움은 지속되지 않는 법이다. 아름다움은 간혹 한 찰나에 불과하다.” 사진은 바로 이 기회를 잡았다. 사진은 그것 보여준다. 순간성, 바로 그것이다. - 레비 스트로스, 『보다, 듣다, 읽다』
- 레비 스트로스, 『보다, 듣다, 읽다』
있는 그대로의 진실 담는 최민식,
1960년 부산, 시장 좌판 앞에서 어머니는 가슴을 내 놓고 있다. 그리고 손을 뒤로 하고 아이에게 젖을 먹인다. 누나에게 엎혀 있는 아기는 어머니의 젖을 빤다. 오른손은 엄마의 왼쪽 가슴을 만지고 있다. 이 작품은 우리 부모님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담고 있다. 최민식 선생은 이 사진이 자신의 대표적 사진이라고 말했다.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어머니는 생선을 팔고 있었어. 아이는 보채고 있었고... 그런데 손이 더러워 아이를 안을 수 없었지. 결국 사람들이 다니는 좌판 앞에서 아이에게 젖을 먹일 수 밖에 없었어." 전쟁은 끝났지만 가난한 나라에서 우리의 어머니들은 먹고 사는 문제로 길거리에 나와야 했다. "당시는 아기를 맡겨 놓고 다닌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어. 그러기에 어머니들은 아이를 데리고 나올 수 밖에 없었지."
우리의 자화상, 바로 이겁니다
'시대를 담는 사진작가'라고 불리는 최민식 선생은 황해도 연안에서 태어났다. 1955년 미술 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밀항했다. 주경야독하던 중 어느날 헌책방에서 에드워드 슈타이켄의 작품집 <인간 가족전>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아 사진을 홀로 공부하기 시작했단다. 1957년 귀국해 부산에서 사진활동을 시작했다.
"사진은 진실과 가까이 있을 때 울림이 크고 빛나 보인다."
"사진의 치열함은 오로지 진실을 찾는데 있다."
"사진은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휴머니즘은 이제껏 나의 사진 창작의 중심 사상이었으며, 앞으로도 계속해 사진을 통해 나의 사상이 대중의 마음 속 깊이 울려 퍼질 수 있도록 매진할 것이다."
"사진이란 다방면에 걸친 공부와 체험이며 사진을 하려면 음악, 미술, 철학 등 다른 방면의 예술을 이해해야 하고 다른 예술작가들의 생애와 사상을 배워야 사진을 통해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법을 알게 된다."
그가 50년을 사진과 함게 살면서 한 여러가지 말들의 일부다. 사진가 최민식의 사진은 화려한 사진이 아니다. 가난과 고통을 다룬 어두운 장면이 많기 때문에 대부분 흑백이다. 추운 겨울 장갑도 없이 신문을 파는 소년, 비오는 날 생선 몇 마리 좌판에 놓고 비닐을 뒤집어 쓰고 앉아 있는 무표정한 여인. 힘에 부치듯 아기를 업고 있는 소녀, 일거리가 없는지 리어카에 벌렁 누워 잠을 청하는 사내까지... 1957년 부산 풍경부터 최근까지 그의 사진은 한국현대사 50여 년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는 이러한 사진들이 사회를 변화시킬 힘을 갖고 있다는 신념이 있다. '사진을 통해 사람들에게 나눔의 정신을 심어주고 싶다'는 그는 지금도 카메라를 둘러메고 가난한 그들을 찾아 길을 떠난다.
안동. 1965.
대구역 앞 . 1965.
부산. 1965.
부산. 1965.
부사산동래 거제동. 1965.
경남 남해. 1965.
경남 언양 장터. 1965-1
부산. 1965.
부산 서면 1965.
부산. 1965.
경남 진주. 1966.
부산항 부두. 1966.
부산역 앞에서. 1966.
부산. 1966.
부산. 1966.
부산 1966년
이 사진은 외국에서 호평을 받았어. 얼굴 표정에 좋은 점수를 준 게지. 요즘에는 찾기 힘든 얼굴 표정이야. 1966년이라면, 막 산업화와 도시화가 시작되면서 농촌이 해체, 가족의 해체를 통해 도시빈민이 된 가장들이 하나둘씩 생겨나던 대였지. 바로 그러한 시대 상황을 포착한 얼굴들이지. 이 사진 찍을 때 사실 마음이 아팠어. 사진 속 남자에게 내가 가지고 있던 돈 몇 천원을 줬어. 안 받으려고 하더라고, 그래도 마음에서 우러나오니 어떻하겠어. 요즘 사진하는 젊이들이 많아. 하지만 젊은이들은 피사체에 대한 애정이 없어.
이 사진을 보고도 느낌이 안온다는 거야. 요즘 젊은이들은 스냅사진의 리얼리티가 오히려 생소한거야. 연출된 것에는 열광하면서도 맨얼굴의 진실에는 불편한 세상이 된 것이지. 난 연출하지 않아. 있는 그대로야지. 요즘 작품에는 조작이 너무 많아.
부산. 1966. 25.4 cm X 20.3 cm.
부산. 1967.
부산. 1967.
서울 용산역, 1967년
용산역 앞, 서울 1957. 용산역 부근에는 폭격으로 반쯤 부서진 시커먼 건물들이 군데군데 서 있었다. 그중의 한 집 모퉁이에서 국수를 먹고 있는 어린아이를 발견했다. 진저리나게 배고팠던 시절이었다. '굶주림'은 얼마나 구체적이고 위대한 우리의 경험이었던가. 나는 이 아이를 보고만 있을 수 없었고, 결국 한 장의 사진으로 남기게 되었다.
부산. 1967.
부산. 1967.
부산. 1967.
부산. 1967.
부산. 1967.
부산. 1967.
부산. 1967.
부산항 부두. 1967.
부산. 1967.
부산. 1968.
최민식, 1968년 부산.
부산. 1968.
어미의 등에 업힌 아이가 웃는 거 좀 봐....아이를 키운 건 가난한 엄마였고, 가난한 좌판이었고, 다섯마리 고등어였어. 겨우 저것 팔아서 무엇을 살 수 있을까. 육아와 돈벌이와 인간으로 영위해야 할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치러 내었던 저 어머니의 가려진 얼굴은 어떤 얼굴이겠어? 인간 얼굴 가운데 가장 성스러운 얼굴 아닐까? 차츰 잊혀져가는 우리의 얼굴 아닐까? 인간 본연의 얼굴 아닐까?
부산 용두산 공원 입구, 1968.
1968년 부산. 자갈치 시장에서 짐을 기다리던 지게꾼이 사진작가를 보며 활짝 웃고 있는 모습. "잘 찍어달라"는 부탁까지 했다고
부산. 1968.
부산. 1968.
부산. 1968.
부산. 1968.
어머니의 시간, 1969년 부산. 자갈치 시장에서
자갈치 시장에서 서 있는 어머니 젖을 누나 등에 업힌 채 물고 있는 아이의 모습. 어머니는 손에 밴 비린내 때문에 아이를 안지 못 하고 있다.
자갈치였어. 아이가 누나의 등에 업혀서 어머니의 젖을 빨고 있더군. 나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어. 노출이고 표정이고 구도고 뭐고 따질 겨를 없이 사진을 찍었어. 사진 속 어머니는 셔터 소리에 놀라 나를 바라보더군. 그러더니 천천히 몸을 돌려 등을 보이더군.
한 장을 찍고 나서 더 사진을 찍을 수 없었어. 뭐랄까, 어떤 숭고한 장면 앞에서 압도되었던 거야. 가까이 다가 설 수가 없었어. 각도를 틀어 사진을 더 찍을 수가 없었어. 이 사진은 이 세상에서 단 한 번 있는 장면, 단 한 번의 셔터에 담긴 거야. 나로서는 굉장한 행운이었지. 이 사진은 독일 전시회에서 호평을 받았어. 이런 휴머니티가 그들에겐 낯설었던 것 같아.
이 사진을 자세히 보면 어머니가 뒷짐을 지고 있어. '열중 쉬엇' 자세로 말이야. 자갈치에서 생선을 팔던 여인은 씻을 물이 없었던 거야. 손을 씩고 아이에게 젖을 먹일 시간이 없었던 거야.
부산, 1970.
부산. 1970.
부산. 1970.
부산 당감동 화장처. 1970.
부산.1970.
1972년 부산. 자갈치 시장에서 한 노점상 여인이 단속반에 끌려가고 있는 애처로운 모습
부산. 1972.
부산. 1972.
부산. 1973,
부산. 1973. 50.8 cm X 40.6 cm.
경남 양산 .1974.
부산 선창가. 1974.
부산. 1975
부산. 1975
부산. 1975
1975년 부산. 범어사에서 주름이 깊은 할머니가 열심히 기도를 드리고 있는 모습
부산, 1975 .
1976년 부산. 자갈치 시장의 생선장수 아주머니가 아이를 업고 자장면으로 점심식사를 대신 하고 있는 모습
부산 용두산 공원, 1977
1978. 부산
1978년 부산. 역전에서 비오는 날 한 아이가 자전거를 타다가 물이 튈까봐 다리를 들어올리는 모습
부산, 1978. 40 cm X 50.8 cm.
부산. 1980.
1980년 부산 용두산 공원.
용두산 공원에서 놀고 있던 두 소녀가 손을 번쩍 올리고 있다. 가난하지만 행복해 보이는 모습. 아이들은 어둠속에서도 빛을 찾는다. 세상에는 항상 명암이 존재하니까. 그들이 세상을 향해 힘차게 뻗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어둠은 거치고 한 줌 빛은 온 세상을 환하게 밝힌다
1981년 부산 영도
어린이는 우리의 미래이다. 우리는 현재를 살고 있지만 어린이는 미래를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어린이들은 스스로 성장한다. 단지 필요한 것은 시간일 뿐이다.
그의 사진은 화려하지 않다.
한국 리얼리즘 사진의 산 증인인 그는 인간을 소재로 사진을 찍었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 특히 가난한 이들을 찾아다니며 50여 년이 넘도록 찍어온 그의 사진 속에는 연출이 없다. 조작하지 않은, 그대로의 진실을 찍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 지론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 사진이라고 그냥 찍는 게 아닙니다. 체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가난하게 자랐고 이들의 고통이 뭔지 느꼈기에 자연히 카메라가 그곳을 향하게 됐습니다."
그는 그가 자라온 어린 시절의 아픔을 그는 사진속에 사상으로 표현했다. "사진의 진정한 멋은 다큐멘터리고, 다큐멘터리 사진은 사랑과 평등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찍어 여러 사람에게 알리고, 가난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평등성을 알게해 겸손하게 만들려는 목적도 있습니다.
사진은 메세지가 강합니다. 소설, 그림, 음악보다 더 강렬합니다. 나는 지금 사진을 한다는 것이 행복합니다. 사진 속에 담겨 있는 많은 메시지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로 전해지고 그 영향력은 확실할 것입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디지털카메라 덕분에 쉽게 사진을 접하지만, 대부분 메시지가 없는 사진을 많이 찍는 것 같습니다."
부산 양전동. 1981.
부산 1981.
부산 자갈치 시장, 1982.
부산 자갈치 시장, 1983.
부산 구포 시장 . 1984.
1984. 부산
경북 왜관읍. 1984.
소년 표정을 짓다, 경남 왜관, 1984.
1985년 부산. 극장가에서 비가 오거나 눈이 와도 그곳을 지키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청년의 모습
내 작품 중에는 신문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아. 신문은 당대의 기록이자 리얼리티 그 자체지. 신문이 사진 속에 피사체로 들어오면 사실성을 더 높이는 작용을 하지. 저 신문팔이 청년, 부디 복 받아 잘 살고 있어야 할텐데. 열심히 일한 사람들이 행복해야 할텐데. 요즈음 몸은 멀쩡한데 정신이 병들어 가는 세상이야. 몸은 불편해도 정직한 정신을 가진 저 청년, 저 얼굴을 한 번 유심히 들여다 보게.
부산. 1985.
부산. 1985.
부산 . 1985.
부산 용두산 공원 . 1986.